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는 남한산성 서문 전망대
지키기 좋은 성, 갇히기 좋은 성남한산성의 지형은 거꾸로 된 성입니다. 보통의 산은 오를수록 좁아지는데, 이 산은 가파른 바깥 비탈을 다 오르고 나면 해발 오백 미터 마루에 너른 분지가 펼쳐집니다. 밖에서 치기는 어렵고 안에서 살기는 좋은, 성벽 둘레가 십 리를 훌쩍 넘고 안에 마을과 우물과 절까지 품은, 하늘이 만든 요새, 일찍이 신라 문무왕 때 주장성이라는 이름으로 성을 쌓았던 자리이고, 조선 인조가 즉위 초에 크게 고쳐 쌓았습니다. 막 즉위했을 때 반란군에 도성을 내주고 공주까지 피난했던 경험이, 이 임금에게 든든한 피난처의 절실함을 가르친 터였습니다. 성역을 맡은 손은 뜻밖에도 팔도에서 모인 승려들이었습니다. 승군을 이끈 벽암 각성의 이름이 기록에 남았으니, 산사의 저력이 산성에도 닿아 있는 셈입니다.
성안에는 행궁을 두었는데, 이 행궁은 전국의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실 건물까지 갖추었습니다. 서울이 무너지면 나라를 통째로 옮겨 담을 수 있는, 비상시의 작은 수도였습니다. 수도란 건물이 아니라 위패와 문서가 있는 곳이라는, 조선다운 정의이기도 합니다. 성안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 숭렬전도 있습니다. 앞서 공주 장에서 궁궐의 미학으로 만난 그 임금이, 농성을 앞둔 인조의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인조는 뒷날 산성을 쌓은 신하 이서를 그 사당에 함께 모시게 했다고 전하니, 천 년 사이의 임금과 신하가 한 공간에서 제사를 받는 드문 풍경입니다.
그 비상이 1636년 겨울에 왔습니다. 아홉 해 전 첫 침입에서 형제의 맹약을 맺었던 청이 이번에는 임금과 신하의 예를 요구했고, 조선이 거부하자 황제가 직접 왔습니다. 청 태종이 몸소 이끈 군대는 압록강을 건넌 지 며칠 만에 서울 어귀에 이르는 속도전을 폈고, 조정이 늘 기대 온 피난처 강화도 길은 끊겼습니다. 인조는 눈보라 속에 남은 길 하나, 남한산성으로 들었습니다. 음력 섣달 열나흗날 밤이었습니다. 군사 만삼천과 쉰 날 남짓의 식량이 그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 책 제6장에서 우리는 답이 사람이 아니라 지형에 있다는 이치를 읽었습니다. 한산의 너른 바다와 명량의 좁은 물목이 이순신에게 답을 주었듯, 남한산성의 지형도 처음에는 답이었습니다. 청군은 끝내 이 성을 무력으로 깨뜨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지키기 좋은 성은 갇히기도 좋은 성입니다. 적은 성을 치는 대신 성을 둘러쌌고, 시간이라는 가장 귀중한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포위는 마흔이레 동안 단 하루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남한산성
마흔이레의 겨울성안의 겨울은 천천히 조여 왔습니다. 그해 추위는 유난해 보초 선 군사들이 성가퀴 위에서 얼어 갔고, 말이 굶어 쓰러지자 그 말이 군사들의 끼니가 되었습니다. 임금의 밥상에서 반찬 가짓수가 줄고, 행궁 마당의 보리짚이 군사들의 이불로 나갔습니다. 성벽 너머 북쪽으로는 두고 온 도성이 아득히 바라보였으니, 임금은 마흔이레 동안 제 수도를 눈에 두고 갇혀 있었던 셈입니다. 성 동쪽 바깥의 벌봉 바위가 성안을 굽어보는 약점이어서, 뒷날 그 봉우리까지 외성을 늘려 쌓는 숙제도 이 겨울이 교훈이었습니다. 성문을 열고 나가 벌인 작은 싸움들이 없지 않았으나 판세를 돌리지는 못했고, 팔도의 구원병은 산성 어귀에서 번번이 꺾였습니다. 그 끊긴 길을 나무꾼 출신 서흔남 같은 이들이 변장으로 넘나들며 장계를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름난 신하들 곁에서 이름 없는 존재들의 연결이 성을 숨 쉬게 한 것입니다. 해가 바뀐 정월에는 청군의 신무기 홍이포가 성안까지 포탄을 떨구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이 버텼으나 하늘이 뚫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월 하순, 마지막 끈이 끊어졌습니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함락시켜, 피해 있던 빈궁과 원손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성안에 닿은 것입니다.
그렇게 마흔이레가 갔습니다. 성첩 위의 겨울을 견디는 동안, 행궁 안에서는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싸우다 죽을 것인가, 살아서 굽힐 것인가, 소설과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그 논쟁입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그 겨울의 말들을 오늘의 독자에게 되살려 놓았고, 같은 이름의 영화가 그 설전을 화면에 옮겨 세계의 관객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찢는 사람, 붙이는 사람
명분과 의리를 지키고자 운명의 결정을 주장하는 척화의 김상헌은 말했습니다. 오랑캐에게 무릎 꿇고 보존한 나라는 이미 그 나라가 아니다. 명나라와의 의리, 문명국의 자존, 선비가 목숨보다 무겁게 여겨 온 것들이 그의 옳음이었습니다. 무력 충돌보다는 말과 타협을 통해 풀어가려는 주화의 최명길은 답했습니다. 만백성과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된 뒤에 의리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우선 보존해야 훗날이 있다는 것이 그의 옳음이었습니다. 한쪽은 뜻을 지키자 했고 한쪽은 사람을 지키자 했으니, 둘 다 나라를 지키자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최명길은 화살이 오가는 사이 몸소 적진을 드나들며 담판했고, 출성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곁의 사람들에게 구조되었습니다. 제 말에 제 몸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논쟁에는 구경꾼의 자리가 없습니다.
논쟁이 정점에 이른 것은 항복 국서를 쓰던 날입니다. 스스로를 신하라 일컫는 글자를 적어 넣는 일이었으니 붓을 쥔 손인들 가벼웠겠습니까만, 최명길이 청 진영에 보낼 글을 짓자 김상헌이 그 문서를 빼앗아 찢고 통곡했습니다. 최명길은 찢긴 종이를 주워 풀로 붙이며 말했다고 당대의 기록은 전합니다. 조정에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이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 한국사에서 이만큼 진한 의미를 지닌 문장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옳음에 취하지 않고 상대의 옳음이 나라에 필요함을 인정한 말, 찢는 손과 붙이는 손이 실은 한 몸이라는 통찰이기 때문입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성을 나섰습니다. 임금은 용포 대신 푸른 평복 차림으로, 항복하는 자는 정문을 쓸 수 없다는 법식에 따라 서문으로 나가, 한강 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를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삼배구고두, 조선 왕조가 겪은 가장 쓰라린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그 절로 도성의 백성은 도륙을 면했고, 나라는 지도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심양에 끌려가 여덟 해를 살았고,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그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볼모살이에서 돌아와 임금이 된 봉림대군, 효종, 은 평생 북벌을 별렀으나 끝내 칼을 뽑지 못한 채 떠났으니, 산성의 겨울은 한 세대의 가슴에 그렇게 길게 남았습니다. 청은 척화를 주도한 신하들도 넘기라 했고, 윤집·오달제·홍익한 세 사람이 끌려가 심양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뒷날 삼학사라 불리며 기려지는 이들입니다. 승자가 제 공덕을 새기게 한 삼전도비는 지금도 서울 송파의 호숫가에 서서, 지우고 싶은 역사도 역사임을 증언합니다. 비석의 몸에는 같은 내용이 만주 글자와 몽골 글자와 한문, 세 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제국의 언어가 돌 하나에 함께 새겨진 모양이니, 키릴과 한글을 나란히 쓰며 살아온 독자라면 그 삼중의 문자가 예사로 보이지 않으실 터입니다.

남한산성 서문
성가퀴 뒤에 서서이야기의 마지막 장은 산성이 아니라 만주의 감옥에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청은 끝까지 저항을 주장한 김상헌을 일흔의 노구로 심양에 압송했고, 몇 해 뒤에는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최명길마저 같은 옥에 가두었습니다. 찢은 사람과 붙인 사람이 적국의 감옥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두 노인은 벽을 사이에 두고 시를 주고받았습니다. 조용히 두 사람의 평생을 헤아려 보니 백 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나, 김상헌이 그렇게 보내자 최명길이 받았습니다. 그대 마음 돌 같아 끝내 구르지 않고, 나의 길은 고리 같아 형편 따라 도는구려. 돌과 고리, 서로의 다름을 끝내 바꾸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옳음에 절했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끌려가는 길에 김상헌이 남겼다고 전하는 시조의 그 산과 강을, 두 사람은 함께 그리워하며 세월에 몸을 맡겼습니다.
산성마을의 닭백숙은 성곽길 답사객의 오랜 보양식이고, 효종갱이라는 해장국에는 재미난 내력이 전합니다. 산성에서 밤새 고아 새벽길에 서울 양반가까지 날랐다는 국이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배달 음식으로 꼽히곤 합니다.
남한산성에 가시거든 남문으로 들어 서문에서 걸음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정문인 남문은 임금이 들어온 문이고 서문은 나간 문이니, 두 문 사이의 거리가 곧 마흔이레입니다. 항복의 길이 열렸던 서문은, 얄궂게도 오늘은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조와 야경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같은 문이 한 시대에는 치욕의 문이었고 다른 시대에는 전망의 문이 됩니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시간이 뜻을 바꿉니다. 치욕의 자리를 숨기지 않고 전망대로 내어놓는 일, 그것도 하나의 답인지 모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끼고 도는 성곽 한 바퀴는 세 시간 남짓, 수어장대 다락에는 무망루, 잊지 말자는 뜻의 현판이 걸렸으니, 치욕을 기억으로 바꾼 후손의 글자입니다. 장대 곁 매바위에는 성 쌓기를 맡았다 모함으로 처형된 이회의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 죽는 자리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라 결백을 증언했다는 이야기이니, 이 산은 억울함까지 돌에 새겨 기억합니다. 그 마루에 앉아 숨을 돌리고, 그때 승군이 머물던 아홉 절 가운데 오늘까지 남은 장경사와, 심양에서 처형된 세 신하를 모신 사당 현절사를 지나, 행궁의 좌전, 종묘 위패를 모시려던 그 건물, 까지 보시면 마흔이레의 동선이 대강 그려집니다. 내려오는 길에 송파 석촌호수의 삼전도비까지 들르시면, 산성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강가에서 닫힙니다.
두 개의 옮음, 김상헌과 최명길 두 사람의 시에 옛 동양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돌처럼 곧은 사람과 고리처럼 도는 사람,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주역』이 평생의 책이었던 최명길은 그 변통의 이치를 나라의 일에 썼고, 김상헌은 곧음을 모든 변통의 바탕이라 여겼습니다. 바탕 없는 변통은 표류가 되고 변통 없는 바탕은 부러지니, 공동체에는 언제나 둘 다 필요합니다. 낮의 회의에서는 그 땅의 말로 살아남고 저녁의 부엌에서는 제 말을 지킨 어머니들처럼, 낯선 체제 아래서 살아남는 일과 제 것을 지키는 일 사이를 백 년 동안 건너온 사람들이라면, 이 두 옳음이 결국 한 살림의 두 손이었음을 누구보다 깊이 알 터입니다. 살아남았기에 지킬 수 있었고, 지킬 것이 있었기에 살아남음이 뜻을 가졌습니다.
성벽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안의 사람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왔고, 그 걸음이 백성을 살렸으며, 그 치욕을 잊지 않은 기록이 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여러분이 서문 돌계단에 서서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저녁이 온다면, 한번 스스로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라면 그 겨울에 찢는 사람이 되었을까, 붙이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느 쪽을 골라도 좋습니다. 산성은 두 답을 모두 품고서 사백 년을 서 있습니다. 그리고 두 답 사이로, 오늘도 솔바람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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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가는 길: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9번 버스로 산성 로터리까지 이십 분 안팎, 수도권에서 가장 닿기 쉬운 세계유산(2014년 등재)입니다.
• 반나절 동선: 남문 (임금이 들어온 문) → 수어장대 (무망루 현판) → 서문 (나간 문, 서울 조망) → 행궁 (좌전) → 숭렬전·현절사·장경사. 내려와 송파 석촌호수의 삼전도비로 이야기를 닫습니다.
• 철과 시간: 서문 전망대는 낙조와 야경의 명소. 성곽 일주는 약 세 시간, 남문~서문 핵심 구간만이면 한 시간 반.
• 맛과 쉼: 성안 마을의 닭백숙·도토리묵 골목이 산행의 보상입니다.
• 알아 둘 것: 행궁은 월요일 휴관. 솔숲 성곽길은 흙길이라 운동화를 권합니다.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행궁(行宮): 임금이 도성 밖에서 머물던 임시 궁궐.
• 척화(斥和)·주화(主和): 화친을 물리치자는 주장과 화친으로 보존하자는 주장.
•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며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청나라의 예법.
• 수어장대(守禦將臺):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영의 지휘소.
• 볼모: 약속의 담보로 상대 나라에 보내져 머물던 사람. 인질의 옛말입니다.
• 농성(籠城): 성문을 닫아걸고 성안에서 버티는 일.
• 압송(押送): 죄인을 잡아 호송함.
• 출성(出城): 성을 나감. 1637년의 출성은 항복을 뜻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