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성보박물관 앞에 있는 삼층석탑과 안성금 작품 '부처의 소리'
칼 대신 새긴 글자13세기, 고려는 세계를 휩쓸던 몽골의 말발굽 아래 있었습니다. 1232년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모셔 두었던 첫 번째 대장경, 이백 년 전 거란의 침입 때 발원해 새긴 판들, 이 모두 불탔습니다. 고려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 등불이었지만, 대장경을 처음부터 다시 새기기로 합니다. 이때 문인 이규보가 짓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향을 피우며 올린 맹세의 글이 남아 있습니다. 거란의 군대가 물러간 것이 대장경을 새긴 정성의 힘이었으니, 어찌 이번이라고 부처의 응답이 다르겠는가, 칼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칼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강화도에 도감을 차리고 남해에 분사를 두어, 1236년부터 열여섯 해에 걸쳐 경판 팔만 천이백여 장이 새겨졌습니다. 전쟁 한복판의 열여섯 해, 피난 수도 강화에서, 바다 건너 남해에서, 칼 소리를 등지고 끌을 잡은 세월입니다. 경판 한 장은 길이가 두 자 남짓에 무게가 서너 킬로그램, 모두 쌓아 올리면 백두산보다 높다는 셈이 흔히 인용될 만큼의 분량입니다. 담긴 것은 불경 몇 권이 아닙니다. 부처의 말씀(경)과 계율(율)과 후대의 풀이(론)를 아우른 천오백 종 가까운 책, 육천오백 권의 총서입니다. 양면에 새긴 글자가 오천만 자를 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쓴 듯 글씨가 고르고 잘못 새긴 글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이 경판의 이름난 미덕입니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켜서 바닷물에 담가 결을 삭이고 그늘에 말린 뒤 새기고 옻을 입혔다고 전하며,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전승은 전승대로 두더라도, 팔만 장의 고른 글씨 그 자체가 어떤 마음의 물증인지는 누구나 알아봅니다. 판 끝에 새긴 이의 이름을 남긴 경우도 많아, 승려와 벼슬아치와 이름 없는 백성까지 온 나라의 손이 이 일에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중에도 고려가 만든 것은, 고려 사라지고 난 뒤에도 가장 오랫동안 남을 정성이었습니다.
바람이 다니는 집
경판은 강화 선원사에 모셔져 있다가 조선 태조 때 뱃길로 서울을 거쳐 가야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실록은 임금이 몸소 강가에 나아가 그 행렬을 맞았다고 적었습니다. 수만 장의 목판이 배와 수레와 등짐으로 산문에 들었을 그 길을 떠올려 보면, 옮기는 일 자체가 또 하나의 불사였겠지요. 그리고 성종 때인 1488년, 절의 가장 높은 자리, 해발 육백오십 미터쯤의 남서향 비탈, 골바람이 지나고 볕이 깊은 곳, 에 지금의 책장이 섰습니다. 자리부터가 설계의 절반이었습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긴 집 두 채가 나란히 앉은 장경판전입니다.
팔만대장경을 품은 합천 해인사
옮겨 온 경판은 곧 나라의 자랑이자 이웃 나라의 선망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전기 내내 수십 차례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청했고, 인쇄본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경판 자체를 내어 달라며 세종 앞에서 단식까지 벌인 일이 실록에 남았습니다. 조선은 끝내 책만 찍어 주고 책판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한꺼번에 쉰 벌을 찍어 큰 절들에 나누었으니, 새긴 것은 고려요 지킨 것은 조선이었습니다. 갖고 싶어 단식까지 하던 일본의 간절함이, 이 책의 가치를 반증하는 셈입니다.겉보기에 이 장경판전은 수수합니다. 단청도 없고 꾸밈도 없이, 벽마다 창살 창만 줄지어 뚫렸습니다. 그런데 그 창에 비밀이 있습니다. 남쪽 벽은 아래 창을 크게 위 창을 작게, 북쪽 벽은 거꾸로 위를 크게 아래를 작게 냈습니다. 골짜기에서 올라온 바람이 큰 창으로 들어 실내를 한 바퀴 돌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도록, 집 전체가 숨을 쉬게 설계한 셈입니다. 안의 서가도 같은 이치입니다. 경판마다 양 끝에 마구리를 덧대 세로로 꽂으면 판과 판 사이가 저절로 벌어지니, 꽂아 두는 것만으로 책장 속에 바람길이 납니다. 해가 낮게 드는 철이면 살창으로 든 빛이 서가와 바닥에 긴 줄무늬를 그리며 하루치 길을 옮겨 간다고 하니, 바람만이 아니라 빛도 노니는 집입니다. 바닥 흙에는 숯과 횟가루와 소금을 켜켜이 다져 넣어 장마에는 습기를 머금고 가뭄에는 내뱉게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주에서 우리는 구멍 숭숭한 돌담이 바람을 통과시켜 거센 바람을 이기는 이치를 읽었습니다. 장경판전은 그 이치의 가장 정교한 판본입니다. 막아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통하게 해서 지키는 것.
해인사는 일곱 차례 큰불을 겪어 법당들이 거듭 타고 다시 섰지만, 판전만은 번번이 불길을 비껴갔습니다. 절을 거의 삼켰던 19세기 초의 가장 큰불 때도 그랬습니다. 더 놀라운 시험은 현대에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첨단 설비를 갖춘 새 보존고를 지어 경판을 옮기려 했는데, 시험 삼아 옮긴 경판들이 도리어 탈을 일으켜 계획을 접고 옛 집으로 되돌렸습니다. 오백 년 전 장인의 손길이 현대 공학을 이긴 셈입니다. 요즘 장비로 재 보아도 판전 안의 온습도는 연중 큰 흔들림이 없다고 하니, 팔백 년의 시험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다만 기후가 흔들리는 시대라 옛 슬기에 기대기만 할 수는 없어, 정밀한 관측과 관리가 그 곁을 함께 갑니다. 장경과 판전이 나란히 세계의 유산이 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글자를 새긴 정성과 글자를 지킨 슬기가, 따로 또 같이 인류가 함께 지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판전이 1995년 세계문화유산에, 경판이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올랐고, 첫 대장경의 발원으로부터 천 년이 되던 2011년에는 대장경 천년 축전까지 열렸으니, 천 년을 기념하는 책은 세상에 흔치 않습니다.
물소리로 산을 두른 사람
해인사로 드는 홍류동 계곡에는 이 절보다 먼저 이 산을 사랑한 사람의 자취가 있습니다.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입니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 가 그곳 과거에 붙었고, 반란군 두목 황소를 꾸짖는 격문 한 편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황소가 그 글을 읽다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믿을 일은 아니나, 글의 위력을 전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신라는 기울어,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식솔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들어갔고, 다시는 산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갓과 신만 숲에 남기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은 전설로 읽되, 계곡 바위에 정자 하나가 그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또 다른 호 해운(海雲)은 오늘 부산의 바닷가 해운대라는 땅 이름이 되었으니, 초당 허엽의 호가 강릉의 마을 이름이 된 것과 같이 사람과 땅이 이름을 주고받는 같은 갈래의 사연입니다.
그가 이 골짜기에서 지은 시 한 수가 절창입니다. 세상의 옳으니 그르니 하는 소리가 행여 귀에 닿을까, 일부러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둘러 버렸다, 물소리로 담을 쌓은 것입니다. 막지 않고 통하게 해서 지키는 판전의 방식과, 소리로 소리를 막은 이 시의 방식은 한 골짜기에서 나온 형제 같습니다. 바람 잔 바다에 만물이 비친다는 해인의 비유까지 더해 보면, 이 산이 글자의 책장이 된 까닭이 짐작됩니다. 고요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무엇이든 오래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습니다. 덧붙이면 가야산이라는 이름부터가 옛 가야의 기억입니다. 대가야의 시조를 낳았다는 산신 정견모주의 이야기가 이 산에 깃들어 전합니다.
판전 창살 앞에서 읽는 법
해인사에 가시거든 버스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리시기 바랍니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절까지 오르는 길이 소리길이라는 이름으로 닦여 있습니다. 두어 시간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걷다 보면 최치원의 농산정을 지나는데, 계곡 바위에는 그의 시가 새겨져 물소리와 나란히 흐릅니다. 길은 이어져, 단풍철이면 계곡 이름 그대로 붉은 물이 흐릅니다. 걸음이 허락하면 산내 암자 백련암도 좋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널리 알려진 성철 스님이 머물던 곳입니다. 그를 만나려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법당에서 삼천 배를 올려야 했다는 일화가 남아, 만남 하나에도 무게를 두던 어른의 기준을 전합니다. 또 다른 암자 홍제암은 임진왜란 뒤 바다를 건너가 담판으로 끌려간 동포 삼천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 사명대사가 만년을 보내고 입적한 곳이니, 데려간 자가 아니라 데려온 자의 이름이 이 산에 잠들어 있습니다. 절에 들어 일주문과 봉황문을 차례로 지나면 대적광전, 그 뒤 가장 높은 마당에 오르면 장경판전입니다. 판전 곁 동서의 작은 두 집, 사간판전에는 해인사가 따로 새기고 거두어 온 고려의 목판들이 함께 쉬고 있습니다. 성보박물관의 희랑대사 초상 조각도 놓치지 마시기를, 나무와 옻으로 만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 조각으로 꼽히는 상입니다. 왕건을 도왔다는 고려 초 큰스님의 주름과 광대뼈가 천 년을 건너 그대로이니, 이 산에서는 글자만이 아니라 얼굴도 늙지 않습니다. 마당에 서면 가야산 능선이 책장 지붕 너머로 흐릅니다. 내부는 들어갈 수 없지만 창살 사이로 서가에 꽂힌 판들의 마구리가 어슴푸레 보이고, 창을 스쳐 나오는 바람이 뺨에 닿습니다. 팔백 년 묵은 글자들이 쉬는 숨입니다. 발길은 창밖까지만, 그 거리감마저 보존의 일부입니다.
끼니는 절집의 법대로, 사하촌의 산채정식이 정갈하고, 욕심을 덜어 낸 사찰음식 한 상이 장경판전의 마음과 한 결입니다.
판전 아래 한 사람의 비석도 잊지 말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가야산에 숨은 적을 괴멸하라는 폭격 명령을 받은 공군 편대장 김영환은 해인사 상공에서 끝내 폭탄을 떨구지 않았습니다. 절과 경판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는 항명이었고, 그 결단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는 빈터를 답사하고 있을 테지요. 그는 몇 해 뒤 비행 중에 순직했고, 절 들머리에 그를 기리는 비가 섰으며, 절은 지금도 해마다 그를 위한 재를 올립니다. 바람과 숯과 창살이 지킨 글자를, 마지막에는 사람의 양심이 지켰습니다. 지킴의 설계도에는 건축만이 아니라 사람의 결단까지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지키는 일의 계보는 낯설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연해주에서 강제로 화물열차에 오르던 증조부모들이 챙긴 것도 결국 사진 한 장, 책 한 권, 그리고 입속의 말이었습니다. 나라가 가장 무너지던 때 글자를 새긴 사람들과, 모든 것을 잃은 길 위에서 말과 글을 지킨 사람들은 같은 답안을 적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지킬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선봉에서 레닌기치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이 신문 백 년 치 지면이야말로 고려인의 장경판이라 한다면,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판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오늘 치 지면이 내일의 경판입니다.
망해 가는 나라가 만든 가장 오래가는 물건, 못과 자물쇠가 아니라 바람과 고요와 사람이 지킨 책장. 여러분이 판전 창살 앞에 서는 날, 바람이 먼저 안부를 물어 올 것입니다. 팔백 년 동안 늘 그래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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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가는 길: 서울서부터미널에서 해인사행 직행버스가 있고, 대구서부에서는 시외버스로 한 시간 반.
● 하루 동선: 대장경테마파크 지도 부근에서 내려 소리길 (홍류동 계곡 7km, 두어 시간) → 농산정 → 일주문~대적광전 → 장경판전 (창살 틈으로) → 산내 암자 백련암·홍제암.
● 철과 시간: 단풍은 10월 말~11월 초 홍류동이 절정이고, 판전 마당은 이른 아침 예불 무렵이 가장 고요합니다.
● 맛과 쉼: 절 들머리 식당가의 산채정식이 정갈합니다. 템플스테이로 하룻밤 묵으면 새벽 예불까지 닿습니다.
● 알아 둘 것: 판전 내부는 비공개, 발길은 창밖까지입니다. 걷기를 줄이려면 버스로 절 입구까지 바로 오를 수 있습니다. 김영환 장군 추모비는 절 들머리에 있습니다.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대장경(大藏經): 불교 경전을 모두 모은 총서. 팔만대장경은 그 목판본입니다.
● 장경판전(藏經板殿): 경판을 모신 건물. ’경판을 간직한 집’이라는 뜻.
● 마구리: 경판 양 끝에 덧댄 나무. 뒤틀림을 막고 바람길을 틔웁니다.
● 이운(移運): 불교에서 귀한 것을 옮겨 모시는 일.
● 법보사찰(法寶寺刹): 부처의 가르침(법)을 모신 절. 해인사가 그 으뜸입니다.
● 발원(發願): 바라는 바를 세우고 비는 일.
● 도감(都監): 나라의 큰 사업을 맡던 임시 관청.
● 항명(抗命): 명령을 거스름. 김영환의 항명이 경판을 살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