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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kabu.ru
굶주림이 건넌 강이번 장의 주인공은 왕도 선비도 장군도 아닙니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1860년, 러시아가 연해주를 얻으면서 두만강 하구는 조선과 러시아가 마주 보는 국경이 되었습니다. 천삼백 리를 흘러 동해에 드는 이 강의 남쪽은 함경도, 산은 높고 들은 좁아 살림이 박하고, 조정의 눈길은 가장 멀던 변방이었습니다. 이 강이 나라의 경계가 된 것은 조선 세종 때입니다. 김종서를 보내 여섯 진을 열고 남쪽 백성을 옮겨 채운 뒤로, 두만강은 사백 년 동안 조선의 북쪽 끝 금이었습니다. 그 하구에는 녹둔도라는 섬이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이순신 장군이 둔전관으로 지키던 조선의 섬, 통영에서 만난 장군의 초기 임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강물이 물길을 바꾸어 섬이 동쪽 기슭에 붙어 버렸고, 1860년의 그 조약으로 러시아 땅이 되었습니다. 국법은 강 건너는 일을 엄히 금했지만, 법이 막은 강을 굶주림이 건넜습니다. 겨울이면 강은 얼어 길이 되었으니, 국경이 가장 얇아지는 계절이었습니다.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열세 가구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 지신허 골짜기에 첫 마을을 일구었다고 러시아에 남은 기록은 전합니다. 그리고 1869년, 기사년의 큰 흉년이 이 변방을 덮치자 강을 건너는 행렬은 둑 터진 물처럼 이어졌습니다. 등에 솥을 지고 품에 아이를 안고 떠난 그들의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씨앗을 심고 이굴 땅과, 그로부터 비롯될 겨울을 날 끼니였습니다.
강은 잔인한 경계였지만, 건너고 보면 길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물이 누구에게는 벽이고 누구에게는 문이었습니다. 이 책이 줄곧 읽어 온 땅의 이치로 말하면, 두만강은 막는 물이자 건너는 물이었습니다. 산이 자리를 정하고(서울), 돌담이 바람을 통과시키고(제주), 물목이 싸움의 답을 주고(통영), 산성이 지키며 가두었듯(남한산성), 이 강은 한 백성의 운명을 둘로 접었다 폈습니다. 훗날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 제목으로 남을 만큼, 이 물가에는 이별이 흔했습니다. 회령·종성·온성의 강가 고을들의 이름은 이제 족보와 이산가족 명단 속에서 더 자주 불립니다.
강 건너에 세운 조선
건너간 사람들이 맨 먼저 한 일은, 여기까지 함께 걸어온 독자라면 짐작하실 그대로입니다. 땅을 일구고, 마을을 세우고, 학교를 열었습니다. 안동 장에서 읽은 그 마음, 배움이 곧 집이라는 믿음, 이 연해주의 골짜기마다 흙벽 학교로 섰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언덕에는 신한촌이라는 한인 마을이 자라 한민학교가 문을 열었고, 강 북쪽 간도의 명동촌에서는 별을 헤던 시인 윤동주가 나고 자랐으니, 그 시인도 도강 세대의 손자였습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로는 이 강 건너 땅이 독립운동의 가장 든든한 뒷마당이 되었습니다.
몇 사람의 이름은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아홉 살에 부모 손을 잡고 강을 건넌 함경도 노비의 아들 최재형은 러시아에서 자수성가해 연해주 한인의 대부가 되었고, 번 돈을 학교 서른여 곳과 의병과 신문에 쏟았으며,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를 뒤에서 받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안중근이 동지들과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땅도 이 연해주였습니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일본군이 신한촌과 한인 사회를 덮친 참변의 와중에 끌려가 순국했습니다.
헤이그에 밀사로 갔던 이상설은 끝내 돌아가지 못한 채 1917년 우수리스크에서 눈을 감으며, 광복을 보지 못한 몸이니 유해도 유품도 모두 불태워 강에 뿌리라 일렀습니다. 그리고 1920년 6월, 두만강 북쪽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크게 승리했습니다. 이 골짜기의 역사는 영화 〈봉오동 전투〉로, 명동촌의 시인은 영화 〈동주〉로 스크린에 옮겨졌으니, 강 건너 세대의 이야기는 오늘 한국 영화의 살아 있는 각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글로도 싸웠습니다. 1908년의 해조신문에서 권업회의 권업신문으로, 이 땅의 한글 활자는 끊긴 적이 없었고, 1923년 3월 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또 하나의 한글 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이름은 선봉, 오늘까지 이어지는 고려인 신문 고려일보의 첫 이름입니다. 그러니 이 장은, 고려일보가 태어난 자리에 닿은 셈이기도 합니다. 그 지면들 곁에서 소설 낙동강의 작가 포석 조명희가 연해주 고려인 문학의 첫 세대를 길렀습니다. 그 역시 1937년의 회오리에 스러졌지만, 그가 심은 글의 씨앗은 제자들의 펜으로 초원까지 건너갔습니다.
1937년 가을
그리고 그해가 옵니다. 1937년 8월의 결정에 따라, 그 가을 연해주의 고려인 십칠만여 명이 화물열차에 실렸습니다. 익은 벼를 논에 세워 둔 채, 며칠의 채비로 떠나야 했습니다. 라즈돌노예 같은 역들에서 기차는 떠났고, 한 달 안팎의 철길, 기차가 서는 역마다 어린 무덤이 남았다고 1세대의 증언은 전합니다. 끝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이었습니다. 시월 초, 첫 기차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곁 허허벌판에 사람들을 내려놓았습니다. 집도 우물도 없는 늦가을 벌판, 사람들은 언 땅을 파고 토굴을 지어 첫 겨울을 났고, 적지 않은 노인과 아이가 그 겨울을 넘지 못했습니다. 우슈토베의 바슈토베 언덕에는 지금 한국어로 새긴 비석이 서서,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곳에 토굴을 짓고 살았다는 사실을 담담한 문장으로 일러 줍니다.
앞에서 읽은 네 글자를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 갱위강국, 떠밀려 온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것. 토굴의 사람들은 봄이 오자 볍씨를 심었고, 초원에 물길을 내어 벼를 길러 냈으며, 콜호스마다 학교부터 세웠습니다. 첫 추수의 볍씨 가운데는 연해주에서 몰래 챙겨 온 씨앗도 있었다고 전하니, 떠나는 짐 속에 이미 다음 농사가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처럼 노력영웅 칭호를 두 번 받은 이도, 카자흐스탄 북극성 콜호스의 김만삼처럼 영웅의 이름을 얻은 이도 이 벌판에서 났으니, 갱위강국은 구호가 아니라 수확량이었습니다. 벼가 자랄 리 없다던 위도의 초원에서 거둔 가을걷이였습니다. 그 겨울을 넘게 한 것 가운데 낯선 카자흐 이웃들이 말없이 내민 빵과 잠자리가 있었다고 1세대는 증언합니다.
신문도 함께 왔습니다. 선봉은 크즐오르다에서 레닌기치로 이름을 바꿔 다시 윤전기를 돌렸으니, 신문 한 장이 민족과 함께 이주를 살아 낸 셈입니다. 봉오동의 홍범도 장군도 그 기차에 있었을 것입니다. 크즐오르다의 극장 수위로 만년을 보낸 그는 1943년 그 도시에서 눈을 감았고, 2021년에야 유해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보다 앞서 같은 도시에 잠들었던 국어학자 계봉우 부부의 유해도 고국으로 돌아갔으니, 총을 든 이와 사전을 엮은 이가 한 도시에 누웠다가 같은 길로 돌아온 사연입니다. 통영 장에서 만난 윤이상처럼, 사람보다 이름이, 이름보다 유해가 늦게 돌아오는 길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이 책이 장마다 놓아 온 다리들, 콜호스의 학교, 문예면의 시, 고려극장의 무대, 초원길의 황금, 화물칸의 책 한 권, 의 저쪽 끝이 모두 이 가을에 묶여 있습니다. 열두 장을 걸어 우리는 결국 여기에 닿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법
그래서 이번 장의 답사 안내는 거꾸로입니다. 열한 번을 한국으로 안내해 드렸으니, 마지막은 강을 건너간 사람들의 자취가 남은 땅들입니다. 두만강이 정 보고 싶으시면 중국 쪽 국경 도시 도문의 강변에 서면 됩니다. 좁은 물 건너 북녘 기슭이 마주 보이는 자리입니다. 강폭이 좁은 곳은 헤엄쳐 건널 만해, 백오십 년 전의 도강의 장면을 생생히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이 강가의 부엌은 명태와 가자미식해의 부엌이었습니다. 함경도의 국수 솜씨가 강을 건너 고려인의 국수로 이어졌으니, 잔칫상의 그 국수 한 그릇이 곧 이 강의 후손입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의 고택이 기념관으로, 이상설의 유허비가 수이푼 강가에, 그리고 그 가을 기차가 떠난 라즈돌노예역이 지금도 서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옛터에는 세 기둥의 기념탑이 서서 옛 마을을 증언합니다. 한국 여행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라면 인천의 한국이민사박물관과 광주 월곡동의 고려인문화관도 들러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떠난 자리의 나라가 떠난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기 시작했는지 보실 수 있습니다.
갈 수 없는 땅을 걷는 법은 결국 세 가지입니다. 기록으로, 기억으로, 그리고 핏줄로. 사주명리라는 학문의 첫 전제는, 사람이 제 태어날 때와 곳을 고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명(命)입니다. 그러나 명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운(運)이라는 글자를 곁에 둡니다. 수원 장에서 읽었듯 운은 옮길 운, 걸어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강 동쪽에서 태어난 것도, 1937년의 기차도 누구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토굴에서 학교까지, 벌판에서 오늘까지 걸어온 길은 온전히 그 사람들의 운이었습니다. 명은 받는 것이고 운은 걷는 것, 백 년의 가족사가 그 문장의 산 증거입니다.
열두 장 동안 우리는 산과 담과 물목과 성과 강을 읽었습니다. 땅의 셈법은 결국 한 줄로 모입니다. 막힌 것은 통하게, 무너진 것은 다시, 떠난 것은 기억으로. 이 부를 닫으며 고백하자면, 저는 이 마지막 장을 쓰려고 앞의 열한 장을 쓴듯도 싶습니다. 한국의 산천을 읽는 법을 말씀드리는 동안, 정작 배운 것은 저였습니다. 땅을 잃고도 땅의 독법을 잊지 않은 사람들, 갈 수 없는 강을 글과 말과 노래로 백 년째 건너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한 부를 닫는 인사는 그래서 감사의 말이어야 마땅합니다. 열두 장을 함께 걸어 주신 발걸음에 깊이 고개 숙입니다. 와유는 본디 다리가 늙은 화가의 일이었지만, 강을 건넌 사람들의 공동체는 와유를 운명으로 받아 예술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이 책이 그 곁에 놓인 작은 지도 한 장이었기를 바랍니다. 지도는 접어 두셔도 좋습니다. 길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으니.
두만강 물은 오늘도 동해로 흐릅니다. 강은 건넌 사람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고, 이야기는 언제나 물을 거슬러 돌아옵니다. 언젠가 그 강가에 함께 설 날이 온다면, 그날은 답사 메모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할머니의 고려말 한마디, 잔칫상의 국수 한 그릇이 이미 그 강의 하류이고, 그것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곧 그 땅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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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두만강 조망: 중국 연길에서 도문까지 버스·기차로 한 시간, 강변 광장에서 북녘 기슭이 마주 보입니다.
● 우슈토베(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차로 너덧 시간, 투르크시브 철도로도 닿습니다. 1937년의 그 철길입니다. 바슈토베 언덕의 토굴 터와 한국어 기념비.
● 크즐오르다·연해주: 크즐오르다에는 홍범도의 거리(유해는 2021년 봉환),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 기념관·이상설 유허비·라즈돌노예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두 시간 안팎이고, 시내 신한촌 기념탑도 함께.
● 한국에서: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광주 월곡 고려인문화관, 한국 답사의 마지막 날에 권합니다.
● 알아 둘 것: 이 장의 답사는 하루에 끝낼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한 점씩 찍어 가는 지도입니다.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월강(越江): 강을 넘는 일. 조선은 이를 죄로 다스렸습니다.
● 원동(遠東): 러시아 극동을 이르던 고려말. 연해주 시절의 기억이 담긴 말.
● 토굴: 언 땅을 파고 지붕을 얹은 첫 집. 고려말로 제믈랸카.
● 콜호스: 소련의 집단농장. 고려인 정착의 단위가 된 마을.
● 선봉(先鋒):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이 신문의 첫 이름.
● 발원(發源): 강물이 처음 시작되는 곳. 두만강의 발원은 백두산입니다.
● 봉환(奉還): 유해나 귀한 것을 받들어 모셔 옴.
● 유허비(遺墟碑): 큰 인물의 자취가 남은 터에 세우는 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