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일보》는 고려인의 카자흐스탄 이주 90주년을 앞두고 1937년의 신문 지면을 다시 펼쳐봅니다.
90년 전, 본지는 소련 극동에서 《선봉》이라는 이름으로 고려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면 속으로 들어가 보면, 강제이주라는 거대한 역사의 한 장면에 가려져 있던 평범한 하루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시 고려인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고, 신문은 어떤 소식을 전했을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걱정했으며,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해 9월, 수많은 가족이 화물열차에 올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강제이주 전, 소련 극동에서 보낸 마지막 해. 1937년의 《선봉》에는 그 운명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하루가 기록돼 있습니다.
농사와 노동, 교육과 문화, 이웃과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 오늘의 우리에게는 평범해 보이는 기사 한 줄, 이름 하나가 그들에게는 바로 그날의 삶이었습니다.
9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고려일보》는 그 시절의 기록으로 돌아갑니다.
《선봉》에서 《레닌기치》를 거쳐 오늘의 《고려일보》까지 차곡차곡 쌓여온 기록을 따라, 강제이주가 모든 것을 바꾸기 전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하루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그해의 신문에는 무엇이 실려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지면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1937년, 평온했던 여름
사진 속 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했던 그 후의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이 사진이 1937년 한글신문 《선봉》(《고려일보》의 전신)에 실린 마지막 사진은 아니다. 편집국에는 그해 9월 12일 발행된 마지막 호가 보관돼 있다. 바로 극동에서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향하는 첫 이주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한 그달이다.
당시 신문에 비친 ‘소비에트 고려인’은 모범적인 시민의 모습이었다. 생산 현장의 우수 노동자이자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사진 설명을 보면 리운호 동지는 훈장을 받았다. 당시 우수 노동자 가운데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성 ‘리’가 '리'로 표기된 것도 눈에 띈다. 이는 한국의 어문 규범이 정비되기 전 사용되던 표기 방식이다. 분단 이후 이러한 표기는 북한에서 유지된 반면, 한국에서는 '이'가 표준 표기로 자리 잡았다.
사진에는 훈장을 받은 리운호와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어린 아들 비탸, 그리고 노동조합 위원장 일리야 김이 함께 앉아 있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누군가의 집에서 신문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모습은 오늘날에는 상당히 낯설게 보인다. 그러나 당시 소련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신문을 함께 읽는 일이 흔했다.
원본 사진을 보면 축음기는 탁자 위에 놓여 있지만, AI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가 달라졌다. 그렇다고 사진이 전하는 내용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축음기는 눈여겨볼 만한 물건이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와 현대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값비싼 물건이었던 만큼 촬영을 위해 일부러 가져다 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축음기가 독자들에게 이 가족이 이미 새로운 소비에트식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사진 속 인물 대부분이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당시 극동의 고려인들이 소련 사회에 얼마나 깊이 편입돼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한국계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사진 오른쪽 위를 자세히 보면 신문 발행일을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7월 3일.
극동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되기 불과 두 달여 전이었다.
사진 속에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평온했던 여름이다.
1937년 신문을 다시 펼쳐본 사람 | 한 블라디미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