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의 한국에서 부치는 편지
와유(臥遊):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그림이나 글로 산천을 여행하는 일
한국에 가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선비가 한 분 있습니다. 공항 환전소에서 받아 드는 천 원 지폐, 그 앞면의 단아한 노인입니다. 곁에는 매화 가지가 드리워 있고, 뒷면에는 시내와 산기슭의 집을 그린 옛 그림 한 폭이 실려 있습니다. 가장 작은 지폐에 새겨진 이 사람이 조선 유학의 큰 산, 퇴계 이황입니다. 이번 장은 그 지폐 속 풍경의 실제 무대, 경상도 안동으로 갑니다. 스스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부르는, 서원과 종가와 옛 마을이 가장 짙게 남은 고장입니다. 서울이 임금의 설계였고 제주가 백성의 슬기였다면, 안동에서는 물러난 선비가 땅을 읽은 법을 읽습니다.
시냇가로 물러난 사람
퇴계라는 호부터가 지리입니다. 1501년 안동 북쪽 온계리에서 난 이황은 고향 토계(兎溪) 시냇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내 이름의 토(兎)를 물러날 퇴(退)로 고쳐 제 호로 삼았습니다. 물러나 시냇가에 깃든다는 뜻이니, 이름 석 자에 평생의 방향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그 방향은 어린 날에 이미 놓였습니다.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 박씨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남보다 몇 배 더 삼가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는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며 더디고 꾸준하게 공부했습니다. 젊은 날 과거에 세 번 떨어진 일도 있으니, 타고난 천재의 길이 아니라 길러진 공부의 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드나든 인근의 청량산을 그는 우리 집 산이라 부르며 평생 아꼈습니다.
실제로 그의 벼슬살이는 사양의 연속이었습니다. 임금이 부르고 그가 사양하기를 수십 차례, 조정이 내린 벼슬을 받지 않거나 받고도 곧 내려놓기를 거듭했습니다. 도망치는 물러남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조정의 자리보다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사화의 시대였습니다. 그 자신도 넷째 형 이해가 사화에 얽혀 매를 맞고 귀양길에 숨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학문의 뿌리를 다시 세우는 일, 그리고 그 학문을 이어받을 사람을 기르는 일이 그에게는 벼슬보다 무거웠습니다. 오죽하면 임금 명종은 끝내 오지 않는 그를 그리워하며 화공을 보내 도산의 풍경을 그려 오게 해 병풍으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마지못해 나간 벼슬도 한양의 요직보다 고을살이를 골랐습니다. 단양 군수로 있다가 형이 그 도의 감사로 부임하자 친족이 같은 관할에 있을 수 없다는 규정을 따라 풍기로 옮겼는데, 바로 그 풍기에서 첫 단추가 끼워집니다.
물러나 있던 그가 세상에 남긴 첫 장치가 서원입니다. 풍기 군수로 있던 1549년, 그는 고을의 백운동서원에 나라의 인정을 내려 달라고 조정에 청했습니다. 임금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 석 자와 책을 내려 주니, 나라가 공인한 첫 서원이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관청의 학교가 아니라 선비들이 스스로 세우고 꾸리는 배움터, 이후 조선 전역으로 퍼져 나간 서원의 시대가 여기서 열렸습니다.
도산서원의 설계도
회갑을 앞둔 1561년, 퇴계는 도산 기슭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거처이자 강학처를 완성합니다. 도산서당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크기입니다. 방 하나, 마루 하나, 부엌 하나, 모두 세 칸입니다. 조선 학문의 일인자가 평생의 자리로 지은 집이 농가보다 작았습니다.
작지만 설계는 치밀했습니다. 퇴계는 집의 칸살과 마당의 구석까지 직접 궁리하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방은 완락재(玩樂齋), 이치를 즐긴다는 뜻이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바위에 깃들인다는 뜻입니다. 마당에는 네모진 연못 정우당을 파 연꽃을 심고, 매화와 대나무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 삼아 절우사라 불렀으며, 샘 하나도 몽천이라 불렀습니다. 주역의 몽괘에서 따온 말로, 어린 싹을 길러 바르게 한다는 뜻이니 샘 이름 하나가 교육 선언입니다. 달밤이면 못가와 매화 곁을 거닐며 시를 읊었다고 전하니, 마당 전체가 늙은 학자의 산책 강의실이었습니다. 그는 이 집에서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종일 책상 앞에 반듯이 앉았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일과 자체가 산 교재였습니다. 제자들이 묵는 집 농운정사는 따로 두었는데, 공부에 힘쓰라는 뜻을 담아 지붕의 평면을 장인 공(工) 자 모양으로 앉혔다고 전합니다. 이 모든 터 잡기와 이름 붙이기의 뜻을 그는 도산기라는 글로 직접 적어 남겼습니다. 집이 곧 교과서였고, 해설서까지 갖춘 교과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서당의 가장 큰 교실은 건물 밖에 있었습니다. 마루에 앉으면 낙동강 물굽이와 건너편 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퇴계는 이 자리에서 우리말 노래 도산십이곡을 지어, 푸른 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 한결같으리라고 노래했습니다. 뜻을 노래한 여섯 수와 배움을 노래한 여섯 수, 열두 곡이 모두 이 마루의 풍경에서 나왔습니다. 산과 물이 그대로 책이고, 풍경이 그대로 공부의 본보기였습니다. 배산임수의 자리에 집을 앉히는 것은 조선 선비들의 오랜 방식이지만, 퇴계에게 그것은 복을 비는 풍수가 아니라 스스로를 기르는 교육의 설계였습니다.
배움의 편지, 매화의 임종
퇴계의 가르침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한 논쟁입니다. 쉰여덟의 대학자에게 어느 날 스물여섯 살 아래의 신진 기대승이 학설의 허점을 따져 묻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같은 본디 선한 네 싹(사단)과 기쁨·노여움·슬픔 같은 일곱 감정(칠정)이 각각 어디서 비롯되는가, 사람 마음의 지도를 둘러싼 이 사단칠정 논쟁은 무려 여덟 해 동안 편지로 이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결말입니다. 퇴계는 젊은 상대의 비판을 받아 자신의 명제를 고쳤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말에 힘입어 내 생각의 거친 곳을 다듬었다는 답장이 남아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것, 도산의 강학이 사백 년을 산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디 퇴계의 가르침은 태반이 편지였습니다. 오늘까지 전하는 그의 편지가 수천 통을 헤아리니, 도산의 강의실은 조선 팔도만큼 넓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길러 낸 문인이 삼백 명을 넘는다고 옛 기록은 헤아립니다. 임진왜란의 조정을 떠받치고 『징비록』을 남긴 류성룡,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성일이 모두 이 마루를 거쳐 간 제자들입니다. 류성룡의 고향이 강물이 마을을 한 바퀴 감아 도는 하회이니, 물돌이와 탈놀이로 이름난 그 마을 또한 이 학맥의 지도 안에 있습니다. 1999년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에서 가장 한국다운 곳을 보고 싶다며 이 마을을 찾아 일흔세 번째 생일상을 받았으니, 세계가 이 고장을 읽는 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570년 겨울, 일흔의 퇴계는 마지막 아침에 이렇게 일렀습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평생 매화를 사랑해 매화 시만 백 수 가까이 지어 따로 시첩으로 묶었던 사람다운 작별이었고, 그날 저녁 그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채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그는 나라의 성대한 장례를 사양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당부하며, 작은 빗돌에 새길 글을 스스로 지어 두었습니다. 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이 많았다로 시작하는 그 자명(自銘)은, 평생 낮춤의 결정판입니다. 물러남으로 시작한 삶을 물러남으로 닫은 것입니다.
세상은 그 물러남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뜬 지 네 해 만에 제자들과 고을 선비들이 서당 뒤편 산자락에 서원을 세웠고, 임금 선조가 도산서원(陶山書院) 네 글자를 내렸습니다. 그 현판 글씨를 두고는, 임금이 명필 한석봉에게 무슨 글자인 줄 모르게 한 자씩 거꾸로 불러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야사는 야사로 읽되, 그 현판 앞에서 붓을 쥔 손이 떨릴 만한 이름이었다는 사정만은 짐작하게 합니다. 서원과 종가들이 지킨 것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책을 찍던 목판 수만 장을 문중마다 보물로 간직해 왔고, 2015년 그 유교책판 6만여 장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습니다. 한 권의 책을 위해 나무를 켜고 글자를 거꾸로 새기던 정성, 이 고장이 사백 년 동안 한 일은 결국 배움을 기록으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퇴계의 유산을 읽는 법
안동에 가시거든 도산서원 진입로부터 천천히 걸으시기 바랍니다. 낙동강을 왼쪽에 끼고 휘어 드는 이 길 끝에서, 앞쪽 낮은 자리에 배움의 집들이, 뒤쪽 높은 자리에 사당이 앉은 서원의 배치를 만납니다. 앞에서 배우고 뒤에서 기린다는 전학후묘의 질서입니다. 서당의 사립문 유정문은 어른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폭이니, 문조차 낮춤의 설계입니다. 마당 한쪽의 세 칸 도산서당과 그 뒤의 큰 서원을 견주어 보시면, 생전의 검소와 사후의 존숭이 한 마당 안에 함께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강학당인 전교당 마루에 서면 마당과 문루 너머로 강과 들이 트이니, 풍경을 끌어들여 가르치던 그 법이 서원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식의 절정이 보고 싶으시면 오후에 병산서원으로 가십시오. 일곱 칸 누마루 만대루에 오르면 굽이도는 강과 병풍 같은 벼랑이 통째로 마루 안에 들어옵니다. 담도 문도 없이 풍경을 빌려 쓰는 차경의 교과서입니다.
끼니는 헛제삿밥이 제격입니다. 제사 없이도 제사 음식처럼 차려 탕국에 나물을 비비는 상이니, 유교의 고을다운 발명입니다. 간고등어, 바다 없는 내륙까지 오는 길에 소금이 간을 맞춘 생선, 와 안동소주가 그 곁을 지킵니다.
강 건너에는 소나무 숲 위로 비각 하나가 우뚝합니다. 시사단입니다. 1792년 정조가 이곳에서 영남 선비들을 위한 특별 과거를 열자 칠천을 헤아리는 선비가 몰려들었던 자리로, 임금이 퇴계의 땅에 보낸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뒷날 안동댐이 들어서며 물에 잠길 처지가 되자 단을 높이 돋우어 지켰으니, 비각은 지금 축대 위에서 강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지갑 속 천 원 지폐를 꺼내 뒷면을 보십시오.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 시내 곁에서 글 읽는 퇴계의 풍경입니다. 그 시내가 바로 호가 된 토계이고, 그 실경이 바로 이 언저리입니다. 지폐 한 장이 답사 안내도가 되는 셈입니다.
퇴계의 핏줄은 먼 훗날 또 한 사람의 글로 이어집니다. 광야와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이 고장 원촌 마을에서 난 퇴계의 십사대손입니다. 서당이 길러 낸 곧음이 사백 년 뒤 감옥에서도 꺾이지 않는 시가 되었으니, 안동이 기른 것은 학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배움의 자리라면, 이 신문의 독자들께도 깊은 내력이 있습니다. 낯선 땅에 내려 살림집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아이들 가르칠 자리부터 마련했다는 고려인 1세대의 이야기를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마을마다 학교가 먼저 섰고, 그 마루에서 자란 아이들이 교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학자가 되었습니다. 시냇가로 물러나 서원을 지은 선비의 마음과, 초원에 내려 학교부터 세운 사람들의 마음은 같은 줄기의 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퇴계는 물러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백 년이 지난 오늘, 조선의 그 어떤 권세가보다 멀리 와 있습니다. 가장 자주 사용되던 지폐에 얼굴이 실리고, 그가 지은 서원에는 해마다 수십만명의 발걸음이 듭니다. 물러남이 사라짐이 아니라 깊어짐일 수 있다는 것, 도산의 마당이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이른 봄에 가신다면 마당의 매화가 먼저 인사를 건넬 테고, 여러분이 암서헌 앞에 서는 날 그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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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가는 길: 서울 청량리에서 KTX-이음으로 두 시간, 또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 세 시간 남짓.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까지 버스로 사십 분 안팎.
• 하루 동선: 도산서원 (세 칸 서당과 큰 서원을 구분해 보기) → 마당에서 강 건너 시사단 조망 → 계상서당 터 (천 원 지폐와 견주기) → 오후에 병산서원 →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에서 물돌이 전경.
• 철과 시간: 이른 봄 서원의 매화가 퇴계의 꽃이고, 만대루의 강 조망은 늦은 오후가 깊습니다. 하회는 해 질 녘 부용대가 백미.
• 맛과 쉼: 안동 구시장 찜닭 골목, 간고등어와 헛제사밥이 이 고장의 상차림입니다.
• 알아 둘 것: 하회마을은 매표 후 마을까지 셔틀이 다닙니다. 병산서원과 하회는 같은 물줄기라 묶어 반나절. 가을 안동탈춤축제 기간에는 숙소를 서두르시기를.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서당(書堂)·서원(書院): 글을 가르치던 사사로운 배움터와, 선현을 기리며 가르치던 사학 기관.
•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 이름을 내려 공인하던 일.
•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에 강학 공간, 뒤에 사당을 두는 서원 배치법.
• 호(號): 본이름 대신 쓰던 또 하나의 이름. 사는 땅에서 따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 인성(印星): 명리에서 나를 길러 채워 주는 힘, 공부·스승·어머니의 글자.
• 사화(士禍): 선비들이 정쟁으로 화를 입던 사건.
• 시묘(侍墓): 부모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삼 년을 지키던 일.
강학(講學): 학문을 갈고 가르치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