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문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을 맨 먼저 맞은 것은 돌로 깎은 짐승 한 마리였습니다. 외뿔에 뭉툭한 몸집, 보기에 따라 웃는 듯도 한 얼굴, 무덤을 지키라고 세워 둔 진묘수입니다. 그 앞에 돌판 두 장이 놓여 있었고, 첫 줄에 무덤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백제 25대 무령왕이었습니다. 삼국시대의 수많은 왕릉 가운데 주인이 누구인지 제 글자로 밝혀진 무덤은 오늘까지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돌판에는 왕도 왕비도 세상을 뜬 지 스물일곱 달 만에 이 방에 모셔졌다고 적혀 있으니, 만 이태를 채우는 삼년상의 가장 오래된 물증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석은 왕이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었는데, 바다 건너 『일본서기』가 전하는 출생 기록과 햇수가 꼭 맞아떨어져 학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일본 기록은 그의 탄생을 이렇게 전합니다. 부모가 바다를 건너던 길에 규슈 앞의 작은 섬에서 그를 낳았고, 그래서 이름이 섬을 뜻하는 사마가 되었다고. 사료는 사료대로 따져 읽어야겠지만, 두 나라의 기록이 한 사람 위에서 만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 작은 섬 가카라시마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무령왕 탄생 기념제가 열려 공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니, 천오백 년 전의 출생이 오늘의 교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덤 속은 작은 국제 도시였습니다. 쏟아져 나온 유물이 사천육백 점을 넘었는데, 임금의 관을 꾸몄던 불꽃 모양 금판부터 공간 자체의 구조까지 출처가 제각각입니다. 방은 중국 양나라식 벽돌무덤이라 연꽃무늬 벽돌이 천장까지 아치를 그렸고, 왕과 왕비가 누운 관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금송으로 짰으며, 그 안의 금 장식과 팔찌는 백제 장인의 솜씨였습니다. 벽에는 다섯 개의 감실을 파고 등잔을 켜 두었으니,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어둠 속에 불빛이 살았겠지요. 왕비의 은팔찌 안쪽에는 다리(多利)라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글자까지 남아, 천오백 년 전 기술자의 이름이 우리에게 닿았습니다. 한 무덤에 세 나라가 들어 있는 셈이니, 당시 백제의 위상을 이 공간이 증언해줍니다.
다만 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조사단은 밤을 새우며 서둘러 하루 만에 유물을 들어냈고, 훗날 조사단장은 그날을 평생의 회한으로 술회했습니다. 무덤은 천사백 년을 기다렸는데 사람은 하룻밤을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한국 고고학계가 후회로 배운 교훈입니다. 그 회한이 뒷날 발굴의 문화를 바꾸어, 오늘의 신중한 손길들이 그 빚 위에 서 있습니다.
돈 일만 닢의 계약서
이 무덤이 남긴 가장 뜻밖의 문서는 돌판의 뒷면에 있었습니다. 매지권, 땅을 산 문서라는 뜻입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돈 일만 닢으로 토왕과 토백과 토부모, 곧 땅을 다스리는 신들과 땅 위아래의 여러 관원에게서 이 자리를 사들여 무덤을 쓴다. 저승에도 관청이 있다고 본 셈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돌판 위에는 중국 양나라 동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습니다. 계약서에 대금까지 치러 둔 것입니다. 문서 끝에는 율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묘한 구절이 붙어 있는데, 이승의 법이 미치지 않는 거래라는 뜻인지를 두고 오늘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왕이 땅의 신에게 대가를 치렀다는 의미를 잠시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천하의 임금도 땅만은 제 것이라 우기지 않고, 본디 주인에게 예를 갖추어 구했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풍습이지만, 백제 사람들은 그 거래를 진지하게 치렀습니다. 이 책 제2장에서 우리는 조선의 음택 방식, 곧 좋은 땅의 기운이 후손에게 울린다는 동기감응을 읽었습니다. 그보다 천이백 년 이상 앞선 이 돌판에 적힌 이치는 다릅니다. 기운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것, 감응이 아니라 계약. 대가를 치렀기에 떳떳한 깃듦이니, 매지권은 무덤 문서이면서 낯선 땅에 정주하는 이의 윤리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다루는 동아시아의 논리가 하나가 아니었음을, 공주의 무령왕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국이 되었다
무령왕이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를 알면 이 공간은 더 깊이 보입니다. 그가 태어나기 얼마 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오백 년 서울 한성을 잃고 임금까지 전사하는 참화를 겪었습니다. 떠밀리듯 남쪽 금강 가의 웅진, 지금의 공주로 내려온 백제는 임금이 잇달아 신하의 손에 죽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바닥에서 즉위한 사람이 무령왕입니다. 그는 둑을 고쳐 물을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농토로 돌려보냈습니다. 강국의 토대는 싸움보다 살림이었습니다. 굶주린 백성에게 창고를 열었다는 기사도 그의 치세 첫머리에 보입니다. 그렇게 스무 해 남짓한 치세로 나라를 추스른 그는, 521년 중국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한 문장을 적어 넣었습니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다시 강국이 되었다, 갱위강국(更爲強國). 이 국서의 사연은 중국의 정사 『양서』 백제전에 실려 오늘까지 전합니다. 잃은 자의 엄살도 이긴 자의 호언도 아닌, 무너진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의 담담한 보고였습니다. 보고는 허세가 아니어서, 국서를 받은 양나라는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이라는 높은 칭호로 답했습니다. 지석 첫 줄의 바로 그 직함입니다.
아들 성왕은 그 회복을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 538년 더 너른 들판의 사비, 지금의 부여로 서울을 옮겨 계획 도시를 세웠습니다. 성왕 자신은 뒷날인 554년 관산성 싸움에서 아들의 군대를 격려하러 가던 길에 매복을 만나 비명에 갔지만, 그가 연 사비의 백 년은 백제 문화의 절정이 됩니다. 『삼국사기』는 첫 임금 온조의 새 궁궐을 두고 일찍이 백제의 궁궐 짓는 법을 여덟 글자로 적어 두었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가운데를 짚는 미학이니, 말은 쉬워도 솜씨로는 다다르기 가장 어려운 경지입니다. 백제 미학을 이보다 잘 줄인 말이 없어, 오늘까지 한국 미의 한 표준처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부여에는 그 미학의 물증과 비극의 물증이 나란히 남았습니다. 들판에 홀로 선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돌을 나무 다루듯 깎아 올린 백제탑의 정수, 익산 미륵사 터의 거대한 석탑과 더불어, 나무 탑을 돌로 번역해 낸 첫 세대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1층 몸돌에는 660년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 장수가 그날의 승전을 새겨 두었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탑은 차마 부수지 못해 승전비로 삼은 것이니, 아름다움이 역사를 그렇게 건사한 셈입니다. 부소산 벼랑 낙화암에는 도성이 무너지던 날 강물에 몸을 던진 이들의 전설이 어렸습니다. 삼천 궁녀라는 숫자는 뒷날 시인들의 과장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지만, 벼랑 아래 백마강의 푸름은 그날의 깊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벼랑 중턱의 작은 절 고란사 뒤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는데, 그 약수 한 잔에 세 살 젊어진다는 우스개가 전해 옵니다. 그리고 1993년, 능산리 절터의 진흙 구덩이에서, 주차장 공사가 들어서기 직전이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천삼백 년 만에 떠올랐습니다. 진흙이 공기를 막아 준 덕에 도금까지 갓 만든 듯 고스란했습니다. 산과 봉황과 다섯 악사를 한 몸에 새긴 이 향로 하나가, 무너진 왕국의 솜씨가 어디까지였는지를 단숨에 증언했습니다. 같은 절터에서는 성왕의 딸, 창왕의 누이, 가 발원했다고 새긴 사리감도 나왔으니, 비명에 간 아버지를 위해 자식들이 절을 세운 사연까지 돌에 적혀 있었습니다. 다섯 악사의 손에는 저마다 다른 악기가 들려, 천삼백 년 전의 합주가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꼭대기의 봉황은 막 내려앉은 참인지 막 날아오르려는 참인지, 감상자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금강 가를 거닐며
공주에 가시거든 공산성 성곽길부터 걸으시기 바랍니다. 이 고장의 옛 이름 웅진은 곰나루라는 우리말의 한자 옷이니, 강가 고마나루에는 옛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암곰이 나무꾼과 정을 맺고 살다 버림받자 강에 몸을 던졌고, 그 넋을 달래느라 나루 이름이 곰나루가 되었다는, 이름의 유래로 전해 오는 슬픈 사연입니다. 금강을 내려다보며 휘어 도는 성벽 위에서, 떠밀려 온 왕조가 기대었던 강과 산의 품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안의 연못 터에서는 글자를 새긴 옻칠 가죽 갑옷이 나와, 누구의 갑옷이며 어느 해의 것인지를 두고 학계가 지금도 토론 중입니다. 땅은 아직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보존을 위해 내부를 닫고 곁의 전시관에 실물 크기로 재현해 두었으니, 벽돌 아치의 결을 거기서 눈에 담으시면 됩니다. 연꽃무늬 벽돌이 그리는 곡선은 사진보다 실물 재현이 훨씬 깊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외뿔 진묘수가 손님을 맞습니다. 한쪽 뒷다리가 부러진 채 천오백 년을 견딘 문지기입니다. 그 부러짐이 우연인지, 영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묶어 두려던 뜻인지를 두고 또한 학계는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지석과 매지권의 실물도 그곳에 있습니다. 공주 땅에는 마곡사도 있습니다. 젊은 날의 김구가 한때 머리를 깎고 숨어들었던 산사로, 백범의 길이 이 골짜기를 지나갔습니다. 봄이면 마곡사 벚길이 태화산 안쪽까지 환합니다. 부여로 건너가시면 정림사터의 탑 앞에 한참 서 보시고, 박물관에서 향로를 만난 뒤, 부소산을 넘어 백마강 바람을 맞으십시오. 강에는 황포돛배가 떠, 물 위에서 낙화암 벼랑을 올려다볼 수도 있습니다. 여름이라면 궁남지의 연꽃이 한창일 텐데, 못을 두고 전하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노래는 『삼국유사』의 설화로 읽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공주는 알밤의 고장입니다. 정안 일대의 밤 농사가 전국의 첫손이고, 부여에서는 궁남지의 연을 닮은 연잎밥으로 백제의 밥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공주 공산성
수도를 잃고 떠밀려 온 자리에서 한 세대 만에 다시 강국을 선언하기까지, 이 서사가 낯설지 않은 독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화물열차에 실려 닿은 초원에서 첫 추수를 거두고, 학교를 세우고, 끝내 그 땅의 존경받는 이웃이 되기까지의 세월을 살아 낸 고려인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갱위강국이라는 네 글자는 그래서 백제만의 말이 아닙니다. 떠밀려 온 모든 이들이 제 삶으로 다시 쓰는 문장입니다. 주어만 바꾸면, 그대로 그 공동체의 비문이 됩니다.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나 바다 건너온 나무 관에 누웠고, 땅의 신에게 대가를 치르고서야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나고 죽는 일 어디에도 경계가 걸려 있던 삶, 그러나 그 경계들이 그의 나라를 가장 트인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진묘수 앞에 서는 날, 부러진 다리로 천오백 년을 버틴 그 문지기가 일러 줄 것입니다. 무너진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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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메모
● 가는 길: 서울에서 공주까지 고속버스 두 시간 안팎, 공주와 부여 사이는 시외버스 한 시간 남짓.
● 이틀 동선: 첫날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 국립공주박물관 (진묘수·지석·매지권) → 공산성 성곽길. 둘째 날 부여, 정림사지 → 국립부여박물관 → 부소산성낙화암고란사 → 궁남지. 여유가 있으면 마곡사로 반나절 더.
● 철과 시간: 궁남지 연꽃은 7월(서동연꽃축제)이 절정, 백마강 황포돛배는 강에서 벼랑을 올려다보는 다른 시선을 줍니다.
● 맛과 쉼: 공주는 알밤의 고장, 밤빵과 밤막걸리, 부여는 연잎밥이 별미입니다.
● 알아 둘 것: 두 박물관이 이 이야기의 심장이니 시간을 아끼지 마시기를. 공주·부여·익산의 백제 터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함께 묶였습니다.
알아 두면 좋은 말들
● 매지권(買地券): 무덤 쓸 땅을 신에게서 샀다고 적은 문서.
● 지석(誌石): 무덤 주인의 이름과 생몰을 새겨 함께 묻는 돌판.
● 진묘수(鎭墓獸): 무덤을 지키라고 세워 두는 상상 속 짐승.
● 전축분(塼築墳):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 중국 남조에서 온 양식.
● 갱위강국(更爲強國):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 무령왕이 양나라에 보낸 국서의 구절.
● 국서(國書):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임금 이름으로 보내던 공식 문서.
● 쌍분(雙墳): 두 봉분을 나란히 잇대어 쓴 무덤.
● 참화(慘禍): 끔찍한 재난.

